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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생활이야기
 
작성일 : 13-02-06 22:24
첫번째이야기_"자유가 없는 천국보단 자유 있는 이곳이 좋아요"
 글쓴이 : 발바닥행동
조회 : 2,288  
 

발바닥행동 미소입니다.

2010부터 진행한 시설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위한 주거복지사업을 통해 자립한 16명의 탈시설-자립생활이야기를 당사자 인터뷰를 통해

"나 자립했다"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회원님들에게 책을 다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메일을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당사자들의 사진 한장, 한장은 발바닥 고은경회원님께서 촬영해 주셨어요.

"나 자립했다" 인터뷰집에 실린 이야기들은

비마이너, 일다에 연재글로 수록되고 있습니다. 언론매체에서도 보실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나 자립했다 인터뷰집에 실린 이야기들을 개인이 사용하실때에는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무단으로 사용하실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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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없는 천국보단 자유 있는 이곳이 좋아요”

자유가 박탈된 천국?

“여기가 천국이야! 도대체 왜 이곳을 나가려는 거야?”

김동필 씨(중복장애 1급)가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한 시설 직원은 곧게 편 검지로 바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뇌병변장애와 언어장애가 있어 검지로 키보드를 어렵게 눌러가며 조용히 인터뷰를 이어가던 김 씨가 그 직원의 모습을 재현할 때에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목소리는 흥분해 있었다.


사진 : 고은경

“그 직원이 왜 그곳을 천국이라고 했죠?”

“시설은 어쨌든 평생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보장되니까요. 또 바깥은 나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살기 힘들고 위험한 곳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돈 때문에 나를 못 나가게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설 입장에서는 장애인들이 돈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든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죠. 반대가 심했어요.
직원들이 번갈아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붙잡으려고 했어요.”

“시설 밖 세상이 장애인이 살기 힘들고 위험한 곳이라는 게 꼭 틀린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천국’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순간 흔들리기도 했어요. 더구나 저는 그곳에서 산 기억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김씨는 이미 그곳이 ‘천국’이 아니라 단지 ‘장애인 거주시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김 씨는 어린 나이에 서울시립아동병원에 맡겨졌다가 6살 무렵에 그곳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만 29년을 살았다. 이어 김 씨는 어렸을 때 그곳이 ‘천국’은 아니더라도 ‘불만은 없는 곳’이었다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이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당시에는 불만 자체가 있을 수가 없었죠.”

김 씨는 학교도 시설 안에 있는 특수학교에 다녔으므로 시설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었다. 찾아갈 가족도, 찾아올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족과의 연은 서울시립아동병원에 맡겨질 때 이미 끊겼다. 대신 김 씨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신 한 방에서 대여섯 명씩 자던 백여 명의 장애인과 직원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그런데 김 씨가 간 시설은 엉뚱하게도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다. 뇌병변장애와 언어장애가 있는 김 씨는 지적장애가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 그곳으로 보내졌다.

당연히 시설 안에 있는 특수학교에서 김 씨에게 맞는 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교육 과정에서 김 씨의 지적 능력이 비장애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겠지만 별다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시설 입장에서 김 씨의 지적 능력은 고려 대상은 아니었다. 김 씨는 그곳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지만 지적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한 특수학교라는 이유로 학력도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니까, 저에겐 수업다운 수업이 이뤄지지 않았어요. 대부분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어요. 저는 과목 중 수학을 좀 잘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곳도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제가 다닐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내가 일을 한다는 것

결국 특수학교를 졸업한 김 씨는 낮에는 시설 내에 있는 보호작업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역시 시설 내에 있는 야간학교를 다시 다니며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 검정고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김 씨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시간 낭비였지만, 생각해보면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소수의 뇌병변, 지체장애인들과 함께 김 씨는 야간수업을 들으며 다시 공부했다.

보호작업장에서는 나무 필통을 만들었다. 그곳도 김 씨에게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지적장애인들과 달리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김 씨에게 사포질이 주어졌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보호작업장에서 일했는데… 사실 일은 거의 하지 못했어요. 저에겐 그냥 사포질하는 시늉만 하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죠. 시설 입장에서는 학교는 졸업했으니 학교로 보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방에 계속 있게 할 수도 없으니, 그곳으로 보낸 거죠.”

김 씨는 보호작업장에서 한 달 월급으로 3만 원 가량을 받았다. 7년 동안 그곳에서 일하면서 3백만 원 가까이 모았다. 거의 돈을 쓰지 않고 모은 셈이었다. 하지만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호작업장이 폐쇄되면서 김 씨는 그나마 있던 일자리를 잃었다. 나중에 효율성을 높인 새로운 보호작업장이 문을 열었다. 김 씨는 그곳에서 일할 수 없었다. 새 보호작업장이 원하는 효율적인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 씨에게 주어진 특별한 일은 없었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김 씨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시설 밖 세상을 서서히 알게 되면서 시설에서 무기력하게, 누군가의 통제를 받으며 지내는 삶을 깨뜨리고 싶어졌다.

“시설에 있으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 먹고, 외출하는 것도 사전에 이야기해야만 나갈 수 있어요. 그런 게 너무 불편했어요. 시설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야기지만 그곳은 자유가 없어요.”

“그럼 시설에서는 재미있는 일은 없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김 씨가 말했다.

“보치아를 할 때 재미있었어요.”

김 씨는 16살 때 한 선생의 제안으로 보치아를 처음 해본 뒤 보치아에 푹 빠졌다. 하지만 김 씨가 살던 방을 담당하는 선생은 그가 보치아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씨는 그 선생의 기분을 살피다가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 ‘보치아를 하자’라고 졸랐다. 그렇게 눈치껏 학교 강당 등에서 보치아를 하면서 김 씨는 보치아 선수를 꿈꾸었다. 시설에서는 보치아를 제법 잘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묻는 말에 김 씨는 구체적인 실력 순위까지 댈 정도였다.

“13명 중 4번째 정도 수준이었어요. 시설에서 나오려고 한 이유 중에는 보치아를 마음껏 해보자는 것도 있었어요.”


“다시 시설로 돌아갈 수는 없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주거복지사업으로 지난 2010년 10월 시설에서 나온 김 씨는 현재 ‘모자이크’라는 팀의 일원으로 보치아를 하면서 여러 대회에도 참가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정립회관 등에 가서 보치아 훈련을 한다.

하지만 시설 밖으로 나와 보니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보치아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라서 약간은 의기소침해 있다. 그래도 2인 1조로 출전한 어느 대회에서 상금을 탔을 때에는 무척 기뻤다며 어깨를 약간 으쓱해 하기도 했다.

“지역사회로 나올 때 두렵지 않았나요?”

“두려웠어요. 여러 번 주저했어요.”

“주저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저는 당연히 제 장애등급이 1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2급이었거든요. 2급이면 활동보조서비스도 받을 수 없고,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시설의 삶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김 씨는 장애등급 재심사를 받기로 하고 시설에서 무작정 나왔다. 나오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시설을 나오기로 한 날, 싼 짐을 풀고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다 활동가들의 설득에 겨우 용기를 내서 나왔다.

당장에 필요한 활동보조서비스는 주거복지사업에서 하루에 3시간씩 긴급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장애등급 재심사로 중복장애를 인정받아 1급으로 장애등급이 상향조정돼 활동보조서비스를 신청할 자격을 얻고 인정조사를 받아 활동보조를 받기 전까지 걸린 한 달 반의 시간은 김 씨에는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긴 악몽의 시간이었다.

“내가 시설에서 나와 왜 이 고생을 할까? 다시 시설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이런 생각을 했어요. 기저귀를 오랫동안 갈지 않아 샌 똥과 오줌이 질질 흐르는데 활동보조인이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오물로 범벅된 방에서 너무 힘들고 비참하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후회했죠. 활동보조가 조금만 늦게 제공되었더라면 시설로 다시 가겠다고 말했을지도 몰라요. 아니, 1급으로 재판정을 받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야만 했겠죠.”

“여기서는 밥도 알아서 사 먹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전동휠체어를 탄 제가 들어갈 수 있는 가게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돈도 있는데 눈앞의 음식을 보고도 들어갈 수가 없어 되돌아가야만 하는 기분이란… 또 가게에 들어간다고 해도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음식을 먹을 수도 없잖아요. 왜 나왔나? 울고 싶은 심정이었죠.”

다행히 활동보조서비스를 받게 된 김 씨는 현재 독거 등 추가급여를 인정받아 하루 6시간꼴인 월 193시간의 활동보조를 이용하고 있다. 그래도 김 씨가 생각하는 시간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김 씨는 월 250시간 정도는 받아야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주중에는 보치아 훈련도 있고 친구도 만나야 하니까 활동보조를 쓰게 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공휴일에는 되도록 안 쓰게 돼요. 한동안은 활동보조를 아무런 계획 없이 썼다가 월말이 다가오면 시간이 부족해 자주 낭패를 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예기치 못한 일들이 있기 마련이라서 계획대로만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활동보조 시간이 더 늘어나면 좋겠어요. 시설에서는 직원이 통제했는데 지역사회에서는 활동보조 시간이 나를 통제하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활동보조 시간을 내가 계획해 쓴다는 게 분명히 다르긴 하지요.”


사진 : 고은경

천국은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바로 여기에서의 삶

김 씨는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연금을 합해 월 60만 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 김 씨는 함께 나온 장애인 동료와 달리 자신은 부모와 연이 끊어져 쉽게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김 씨는 급여 중 매월 20~30만 원은 저축하고 있다. 시설의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면서 돈을 모았던 것처럼, 김 씨는 지역사회에서도 돈을 모으고 또 모으고 있다.

“돈은 왜 모아요?”

“지금은 임대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어요.”

“확실한 주거 공간을 가지고 싶은 건가요?”

“그것도 있고요. 임대아파트에 이미 들어간 아는 형이 있는데 같은 임대아파트에 들어가 그 형에게 일도 배우고 싶어요.”

“어떤 일인가요?”

“인터넷 관련 일이요.”

“그 일을 하고 싶은 건가요?”

“인터넷 작업에 흥미가 있어요… 근데 회계정리 같은 것을 배워서 자립생활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고도 싶어요. 그런데 사실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막연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뚜렷한 계획이 없는 김 씨는 현재 보치아를 하는 시간 외에는 집에 있거나 지하철을 무작정 타고 다니는 ‘여행’을 즐긴다. 김 씨는 시설에서 나오면 부산이나 여수 등 남해안 쪽으로 여행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그곳으로 여행은 가지 못했다. 대신 돈이 들지 않는 지하철 여행에 취미를 붙였다. 그러나 최근 그 여행에 차질이 생겼다고 한다.

“지난 2월에 전동휠체어 배터리를 교체했는데 전보다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요. 배터리 양이 한 칸만 남으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얼른 집으로 돌아와야만 해요. 배터리가 고장 나면 내일 당장 가야 하는 곳에 못 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건강보험 급여로 배터리를 교체하려면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아서… 다음 달에 적금을 타면 배터리를 자비로 바꿀까 고민하고 있어요.”

김 씨에게 ‘천국’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보내는 지금의 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김 씨는 ‘만족’한다고 답했다.

“시설이 ‘천국’이 아니듯이 지역사회도 ‘천국’은 아니죠. 시설에서 걱정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나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래도 이곳에서는 내 마음대로 약속을 잡아 갈 수 있잖아요. 옛날에는 약속을 잡아도 시설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가지 못한 적도 있어요. 그런 게 없으니 자유롭고, 무엇보다 속박을 받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좋아요.”

“저도 여러 번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시설에서 나오시려는 분들이 어떤 심정인지 잘 알아요. 특히 저처럼 시설에 대한 기억밖에 없는 사람은 더욱 그렇겠죠. 물론 아직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려는 장애인들에게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시설에 있는 게 몸은 편할 수 있어요. 탈시설을 지원하는 활동가들이 있긴 하지만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몸은 편하지만 영원히 속박되어 살 것인가, 아니면 때로 몸이 힘들어도 자유롭게 살 것인가. 저는 지금이 좋아요.”

인터뷰 후기

김동필 씨의 인터뷰는 주로 대화를 통해 이뤄졌지만 정확한 의사표현을 위해 컴퓨터 워드프로그램을 이용해야만 했다. 김 씨는 ‘독수리 타법’으로 느리게 컴퓨터 자판을 쳐야만 했는데 김 씨의 의사소통을 지원할 수 있는 의사소통 보조기기와 컴퓨터 보조기기가 있었다면 대화가 더욱 수월했을 것이다.

활동보조인이 한동안 옆에서 의사소통을 도와주기는 했으나 김 씨가 대답하기 전에 활동보조인이 짐작해 대신 답하거나 답변을 유도하는 때도 있어 김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이 100%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글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김 씨는 지역사회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색다른 경험으로 술을 마신 이야기를 했다. 동료와의 술자리에서 기분이 동해 한두 잔을 마셨다고 한다. 신앙이 있고 검소한 김 씨에게 음주라는 일탈은 큰 기억으로 남은 것 같았다.

다만 김 씨는 보치아와 교회 활동, 동료장애인들과의 만남을 제외하면 특별한 사회활동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김 씨가 원하는 일자리 등을 위해서는 더 많은 지역사회 자원이 효과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글 홍권호 장애인인터넷 신문 ‘비마이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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