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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생활이야기
 
작성일 : 13-04-02 13:03
다섯번째 이야기_인생에 두번째 맞이한 자유
 글쓴이 : 발바닥행동
조회 : 1,831  
인생에 두 번째 맞이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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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역마살

최종훈, 마흔여섯의 그가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곳은 충북 음성군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고, 유년기 방랑의 안식처가 되어준 곳이며, 장애를 입은 후 머물렀던 시설도 이곳에 있다. 두 삶이 공존하는 공간에서의 그의 유년기가 궁금해졌다.



“공부에 별로 흥미가 없었어. 매일 싸움을 하러 다녔지. 학교에서 혼나고, 집에서 혼나고 그랬지. 지금도 가끔 이유 없이 머리가 아플 때가 있는데, 그때 많이 싸우고 맞아서 그런가 봐. 살림은 아버지가 거의 도맡아 하셨어.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거든. 어머니한텐 맞은 기억밖에 안 나. 그렇게 혼나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데리고 나가주곤 했지. 돌아보면 어머니가 아버지 같았고, 아버지가 어머니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같았으면 ‘매일 말썽만 일으키고 다녔으니-’ 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땐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참 미웠지. 아버지에겐 애틋한 정이 있었는데, 어머니한텐 그런 것도 없었던 것 같아. 그러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갔는데, 그게 16살 때지.”

최종훈 씨. ⓒ고은경

거부할 수 없는 역마살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얼마의 거친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 타향살이가 고됐고, 몸은 쉽게 망가졌다. 지친 몸을 끌고 쉬러 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고향이었고, 몸을 추스르면 홀연히 타지로 떠났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단 한 번도 그를 의심하거나 질타하지 않았다고 한다. 휘 돌아왔다 떠나는 그를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러다 그가 배운 일이 건축일이었다. 조립식 건축물을 짓고 철거하는 작업을 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목동에서 3년을 살았지. 어린 나이에 뭘 했겠나. 그냥 아는 형네 집에서 지내면서 지냈던 거야. 그러다 열아홉에 음성 부모님 집에 돌아왔어. 아버지가 돈을 얼마 마련해 줘서 처음엔 돼지를 기르다 개도 기르고, 그것도 잘 안 돼서 오리랑 토종닭을 기르고 그다음엔 소를 키웠지. 그러다 훌쩍 부산에 가서 신발공장에 취업도 했고, 외항선을 타려고도 했어. 젊을 때 방황을 많이 했으니까 아무도 없는데 가서 조용히 지내고도 싶었고, 마음도 다스리고 싶었어. 그런데 막상 배 떠나는 날 친구들과 친척들이 마중해주러 나왔는데, 그 배가 타기 싫어지는 거야. 그래서 서울로 왔지. 건축일은 외항선을 안 타고 서울로 왔을 때 일 할 생각 없냐며 아는 형이 소개시켜 준 일이야. 다른 일처럼 잠깐 하다가 말겠지 하며 배운 게 건축일이었고, 10년을 했지. 한군데서 하던 일은 아니었고, 일을 마치고 잠깐 서울에 올라와 있어도 사무실에서 전화가 오면 다시 짐 싸서 일하러 가야 했어. 돈은 많이 벌었지만, 생활이 안정적이지는 않았지. 그래도 내 성격에 그렇게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건 그게 천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얽매임이 싫었다 했고, 한 데 오래 사는 재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삶이 후회스럽거나 고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아쉬움 하나를 이야기했다.

“마음을 잡게 된 게 후배가 소개해 준 여자 때문이었는데, 잘 보이고 싶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딱 두 번 만났는데, 일이 불안정하고, 시간 안 맞아서 더 만날 순 없었지. 안양의 어떤 은행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단아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그 사람에게만큼은 순해지고 착해 보이고 싶고. 소개받고 3~4년 동안 지갑에 사진을 넣어 다녔어. 보고 싶을 땐 사진을 보곤 했지. 그러다 어느 날 선 봐서 결혼한다고 하더라고. 잡을 수도 없었고, 그냥 후배 통해서 사진을 돌려줬어.”

이렇다 할 추억은 없었으나, 바람처럼 방황하던 그를 잡아 준 그녀였고, 그녀를 그렇게 보낸 후 일하던 것들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 곁에서 조용한 삶을 살고 싶었다.



고향땅에 앉은 바람, 아들을 만나다



바람 같던 그가 발목을 고향 땅에 붙잡힌 건 2002년 겨울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마비가 왔고, 청주의 한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형은 다른 치료 방법이 있나 여기저기 수소문했고, 그러다 어떤 스님이 침을 잘 놓는다 해 그 절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러다 2차 뇌졸중이 왔다. 더 이상은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있는 게 없었고, 장애진단을 받아 형네 집으로 퇴원했다. 그러나 끝없이 얹혀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꽃동네로 들어가게 됐어. 그게 2002년도 말이었지. 같이 살아야 하는 장애인들도 많았고, 자폐성 장애인도 많았어. 자리도 없어서 복도에서 지내야 했고. 처음엔 팔자려니 했는데, ‘에이 어차피 뒈질 거면 여기서 죽나 집에서 죽으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오려고 시도를 많이 했지.”

딱히 나갈 방법이 없었던 그였지만, 정작 그를 시설에 잡아뒀던 건 요셉이었다. 조금은 건조하게 이야기를 풀던 그의 얼굴에 애틋함 같은 것들이 스쳤다.

“한 3년을 복도에서 지내다가 방이 배정돼서 잠을 자게 됐는데, 같은 방에 꼬마 애들 대여섯 명이 있었어. 여기서 아들이 생겼지. 요셉이 처음엔 옷방아저씨가 돌봐주던 아이였는데, 그 사람이 시설에서 나갔어. 늘 사람이 부족했는데, 요셉인 유독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지. 그래서 밥 먹여주고 보살펴 줬지.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이 나보고 요셉이 아빠라고 하대. 그렇게 인연이 돼서 요셉이가 죽기 전까지 돌봤어. 꼬마 애들 중에 유독 요셉한테 정이 많이 가더라고.”

팔자려니 생각한 시설생활이었기에, 딱히 누군가와 감정의 각을 세울 일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혼자 휠체어도 탈 수 있었고, 특별한 직원들의 간섭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잠들기 전, 몇 잔의 소주만 있으면 그럭저럭 지낼만한 특별할 것 없는 시설 생활이었다. 그런 그가 시설직원들과 싸움이 잦아지게 된 것도 요셉의 아버지가 된 다음이었다. 그가 아들로 거둔 요셉은 방 아이들 중 가장 장애가 심했던 자폐장애인이었다.

“요셉이 때문에 많이 싸웠지. 아프면 병원 같은 데 보내야 하는데, 몇 번을 이야기해도 듣지를 않는 거야. 그러다 등 쪽 혈관이 막혀서 수술하려고 청주인가를 갔는데, 수술을 해도 못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하대. 한 참 있다가 시설에 있는 병원에 왔다고 해서 보러 갔는데, 링거 맞는 손 같은 데가 팅팅 부어 있고, 느낌에 죽을 것 같더라고.”

그게 요셉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수동휠체어로 산을 넘어서 자주 병원에 가볼 수 없는 노릇이었고, 보면 가슴이 무너져 자주 볼 엄두도 나질 않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죽었어. 이야기를 듣고 허겁지겁 병원에 넘어갔는데, 이미 공동묘지에 갔더라고. 그때 시설에 무슨 행사가 있었는데, 그래서 일찍 갖다 묻은 거지. 가는 얼굴도 못 봤어. 애가 죽었는데 눈을 안 감고 죽었대. 입관하기 전에 눈을 감기려고 했는데, 안 감겨 졌다고 하더라고. 눈뜨고 입관한 거지.”

하얀 요셉의 얼굴이 얼마나 예뻤는지, 요셉이 밤에도 마구 돌아다녀 그이의 몸과 자신의 팔목에 끈을 묶고 잠들었던 이야기, 먹을 걸 힘들게 입에 넣어줬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그리움과 슬픔, 웃음과 분노. 온갖 표정이 그의 얼굴에 앉았다 간다. 그리고 아버지니 가지라고 그에게 건네 준 요셉의 사진과 장애카드를 여전히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인데, 죽음도, 입관도 지키게 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 애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삶에 대해 속죄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화장실에 가서 목 놓아 울었더랬지.”

그가 죽고 그는 더 이상 ‘희망의집’에서 살 수 없었다. 마침 시설에서의 리모델링으로 많은 장애인이 천사의집으로 옮길 기회가 생겼다. 요셉이 살아 있을 땐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던 곳이었다. 요셉이 없는 희망의집에 그는 더 이상 머물 자신이 없었고, ‘천사의집’은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


인생에서 두 번째 자유를 만났다


시설에서 더 이상은 미련 둘 것이 없어졌다. 다행히 천사의집도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2010년 7월에 이음여행이라는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박현, 윤국진과 시설에서부터 나올 준비를 했었지만 시기는 조금 늦어졌다. 하지만 자립의 준비도 시설의 분위기도 비교적 호의적이어서 어렵지 않게 자립을 준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2011년 4월 13일. 바람은 다시 음성을 떴다.

“나올 때 느낌은 담담했지 뭐. 어차피 나오려고 생각해왔으니까. 그런데 ‘나오자마자 죽는구나’ 싶을 정도로 크게 아팠어. 사람들 고생 많이 시켰지 뭐.”

수급재심사가 진행되던 중이라 의료보호가 되지 않고, 어찌어찌 병원의 사회사업실 지원을 받아 몇십만 원으로 해결하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술 많이 먹을 때 하루에 소주 세 병씩은 먹었고, 시설 들어가서도 끊지 못하고 한두 잔은 먹었는데.. 아프고 나서 술을 싹 끊었지. 지금 생각하면 잘 끊었지. 죽도록 아프니까 술 생각도 없어지대.”

오랜 술친구까지 버려야 했던 화려한 자립 신고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설에서 이런저런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터져 나왔다.

“시설에서 나와서 주거비랑 생계비 삭감돼서 고생이 많았지. 수급비가 깎일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수급비가 삭감된다고 구청에서 전화가 와서 동사무소에서 따졌지. 이유를 물었더니, 형이 매달 10만 원씩 보내주는 돈이 문제라는 거야. 다른 일을 할 수 없으니까 이것(수급비)만 받아서 생활하는데. 형이 담배값이나 하라고 보내주는 10만 원, 그걸 소득이라고 삭감한다고 하더라니까. 이해가 안 되대. 싸웠지. 결국은 구청에서 전화가 왔는데, 10월부터 10만 원 삭감된 나머지 돈만 들어온다고 통보하더라고.”

그는 형에게 받던 단돈 10만 원을 ‘더 이상은 보내지 말라’고 정리하고, 그로부터 삼 개월이 지나서야 온전한 수급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주거복지사업에서 월세가 지원된다는 이유로 주거급여도 삭감되었다. 임대료나 가스비 같은 고지서들은 다른 세입자들과 같지만 말이다. 8만 원 남짓한 주거급여는 그가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지급되고 있지 않다.

“이럴 바에는 시설로 다시 가겠다고 했어. 시설과 다를 게 뭐야. 시설에서 나오면, 수급비로 어느 정도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살지 못할 지경까지 돈을 죄다 빼가니까. 더욱이 내가 살고 있는 송파구청에서는 주거비 삭감하지만, 광진구 자양동 쪽에 사는 다른 장애인들은 그렇지 않잖아. 조건이 너무 많아. 2급 장애인이라고 활동보조도 지원 안 되지, 수급조건도 까다롭지… 말로는 탈시설이며 자립생활을 이야기하지만, 나와서 살 수가 없어. 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뭔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

▲2012년 11월 빈곤철폐의 날 기자회견에서. ⓒ고은경

여러 차례의 고비를 넘겼고 그의 자립도 일 년 반이 되었다. 여전히 간 치료를 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지만, 활동은 많아졌다. 자조모임에서 부회장을 맡기도 하고, 가끔은 집회에 나와 구호를 외치는 그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유독 말이 없는 그에게 웃음이 생겼고, 걸쭉한 목소리로 한참 수다를 떠는 모습도 예전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전처럼 어렵지 않다는 그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물었다.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어. 왜 내 젊었을 적에 조립식건물 짓는 일을 했잖아. 지금 장애가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시험에 붙으면 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과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서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어.”

삭감된 돈 중 그가 한 달에 쓰는 돈은 겨우 10만 원 정도다. 나머지는 공동으로 함께 사는 사람과 생활비 10만 원을 나눠내고, 대부분의 돈은 적금과 청약저축에 부어 넣는다.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는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데리고 오고 싶은 동료도 있다.

“이병기라고 시설에서 함께 나오려고 준비했는데, 집이 없어서 못 나왔어. 돈 열심히 모으고, 임대아파트가 되면 우선 병기를 데리고 나오고 싶어. 다들 나와 똑같아. 기회가 있으면 나오고 싶지.”

한 달에 150만 원을 버는 것. 그럼 수급비를 따로 받지 않아도 여느 누군가들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그. 좋은 짝꿍을 만나 인연을 맺는 것도 그의 바람 중의 하나다.

“스토리텔링이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 나는 이미 했던 거고, 진행 선생님의 보조역할을 하고 있는데, 거기 한 아주머니가 어떤 여성분을 소개해 주려고 난리야.”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냥 착한 사람이라면 된다고 한다. 그는 짚단 같은 향을 내는 사람이다. 바람이 여기저기 많이도 앉았다 간 지금의 그는 잘 마른 건초냄새가 난다. 촘촘한 계획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하는 그였다. 주거복지사업이 끝나고, 일상의 변화가 많겠지만, 이런 변화들도 그의 계획에는 들어가 있다. 그에게 찾아온 두 번째 자유, 그 바람이 더 이상은 멈추지 않길 바라본다.

인터뷰 후기

종훈형의 매력포인트는 걸걸한 목소리다. 뇌졸중 때 기도관에 호흡기를 삽입하면서 목소리도 바뀌었다고 한다. 표정도 별로 없고,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그였는데, 어느 순간 얼굴에서 빛이나 던 때가 있었다. 건강이 회복되어서도 그랬을테고, 마음고생이 많다가 생활이 안정적으로 바뀐 것도 이유겠지. 형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혹 그가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않았던 이유가 중도장애인이기 때문일까 궁금했다. 대부분 주거복지사업으로 자립한 장애인당사자들은 선천성 장애인들이 때문에 설령 시설에서 오래 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랜 사회생활을 했던 그와는 경험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형은 “그런게 어딨어, 사람 사는거, 다 똑같은 거지. 그런 건 없어. 지금은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그러면 재미있지 뭐”. 그런 동지가 종훈이 형이다. 아플 적에도 활동보조문제 때문에 애를 먹던 자립동기들의 활동보조를 거들기도 했더랬다. 그의 온화한 성품 뒤에 숨겨져 있던 거센 유년의 경험을 듣는 건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종훈이 형이 아프지 않고, 이루시고자 하는 사업이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 아, 가슴속에 품은 그녀는 이제 바람에 날리고, 새로운 인연도 맺으시길.

글 효정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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